로이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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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이 해리스는 1898년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나 1979년 사망한 미국의 작곡가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수학했으며, 1920년대 초 아서 블리스와 아서 파웰에게 레슨을 받았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수학하며 신고전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르네상스 음악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34년에는 교향곡 '1933'이 상업적으로 녹음된 최초의 미국 교향곡이 되었고, 1939년에는 교향곡 3번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밀스 칼리지, 웨스트민스터 합창단 대학, 줄리아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6년 피아니스트 요하나 해리스와 결혼했다. 해리스는 미국 민요를 장려하고 국제 현악 회의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말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계관 작곡가로 선포되었다. 그는 17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했으며, 교향곡, 실내악, 성악 작품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로이 해리스는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주에서 성장하며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독학에 가까웠으나 아서 블리스, 아서 파웰 등에게 지도를 받았고, 애런 코플랜드의 추천으로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에게 사사하며 르네상스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2]
로이 해리스는 다작 작곡가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교향곡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데, 번호가 매겨진 교향곡 외에도 여러 교향적 작품을 포함하여 최소 18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 중 교향곡 3번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 생애
허리 부상으로 미국에 돌아온 후에는 로체스터의 하워드 핸슨과 보스턴 교향악단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 1934년, 쿠세비츠키의 지휘로 초연된 그의 ''교향곡 '1933'''은 미국 교향곡으로는 최초로 상업 녹음되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의 작품은 1936년 하계 올림픽 미술 경기의 음악 부문에 포함되기도 했다.[3]
1939년,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초연한 교향곡 제3번은 큰 성공을 거두며 해리스에게 전국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4] 이후 그는 줄리아드 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피아니스트 요하나 해리스와 결혼하여 음악적 동반자 관계를 이어갔다. 말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명예 계관 작곡가로 선정되는 등 미국 음악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5]
2. 1. 초기 생애 (1898-1926)
로이 해리스는 1898년 2월 12일 오클라호마주, 챈들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출신이었다. 1903년, 그의 아버지는 오클라호마 주택 경매 수익과 행운의 도박으로 얻은 돈을 합쳐 코비나 근처 샌 가브리엘 밸리의 토지를 구입했고,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했다.[1] 로이 해리스는 이 외딴 시골 환경에서 농부로 자랐다. 그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나중에는 클라리넷을 배웠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공부했지만, 스스로 음악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독학이었다. 1920년대 초, 그는 당시 산타 바바라에 있던 아서 블리스와 미국 원주민 음악 연구가인 미국의 선배 작곡가 아서 파웰에게 레슨을 받았다. 해리스는 농지를 팔고 트럭 운전사이자 유제품 농장의 배달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점차 그는 동부에서 다른 젊은 작곡가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애런 코플랜드의 추천으로 1926년부터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공부하는 젊은 미국인 중 한 명이 되었다.[2]
2. 2. 교육 활동과 후기 (1939-1979)
1939년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초연한 그의 교향곡 제3번은 작곡가에게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그를 사실상 유명하게 만들었다.[4]
1930년대 동안 해리스는 밀스 칼리지, 웨스트민스터 합창단 대학(1934–1938) 및 줄리아드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전문적인 경력의 대부분을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과 상주 작곡가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냈다. 그의 마지막 직책은 캘리포니아에서였는데, 처음에는 UCLA, 그 다음에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가르쳤다. 그의 제자로는 윌리엄 슈만, H. 오웬 리드, 존 도널드 롭, 로버트 터너, 로른 베츠, 조지 린, 존 베럴, 플로렌스 프라이스, 레지나 한센 윌먼, 피터 쉑클 (P.D.Q. 바흐의 창작자로 가장 잘 알려짐), 루디 마르티누스 반 다이크 등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여러 문화상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의 명예 계관 작곡가로 선포되었다.[5]
1936년 해리스는 14세 연하의 피아니스트 요하나 해리스(결혼 전 성은 더피)와 결혼했다. 그녀는 여러 음반을 녹음하고 거의 모든 주요 미국 교향악단과 협연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줄리아드 학교에서 오랫동안 피아노 교수로 재직했다. 해리스는 결혼 전 이름이 Beula Duffey였던 그녀에게 J.S. 바흐를 따라 요하나로 이름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캐나다 백과사전''은 "요하나와 로이 해리스는 미국 음악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들의 협력은 로버트와 클라라 슈만 부부의 협력과 비교되었다. 해리스 부부는 콘서트를 조직하고, 축제에서 심사했으며, 1959년 국제 현악 회의를 설립했다. 그들은 콘서트와 방송에 민요를 포함시켜 미국 민요를 장려했다."라고 언급한다.[6] 부부는 패트리샤, 숀, 다니엘, 모린, 레인 등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두 아들은 196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사이키델릭 록 밴드인 웨스트 코스트 팝 아트 실험 밴드에서 활동했으며,[7] 로이 해리스는 1973년 아들 숀의 동명 솔로 앨범에 현악 편곡을 제공하기도 했다.[8]
해리스는 1947년 웨스트 음악 아카데미 여름 음악 학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9]
3. 주요 작품
교향곡 외에도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합창곡, 발레 음악 등 폭넓은 작품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관현악 작품으로는 '존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 미국 서곡'[16], '미국의 초상' 등이 있으며, 실내악 분야에서는 피아노 오중주(1936)와 현악 사중주 3번(1937) 등이 알려져 있다. 피아노 독주곡으로는 소나타 Op. 1(1928), '아메리카 발라드'(1946), 토카타(1949)[14][15]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에 의해 녹음되었으며, 특히 낙소스(Naxos) 레이블에서 마린 올솝, 테오도르 쿠차르 등의 지휘로 교향곡 전집 녹음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도 했다.
3. 1. 교향곡
화자, 합창, 피아노, 관현악 (개정판)개정판 악보 일부가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초연됨 교향곡 11번 1967 관현악 뉴욕 필하모닉 125주년을 위해 작곡 교향곡 12번 '페르 마르케트' 1967–69 테너 솔로, 화자 및 관현악 건국 200주년 기념 교향곡 1776 (교향곡 13번) 1969–74 6부 합창, 솔로 보컬, 화자, 관현악 작곡가는 13을 기피하여 14번으로 번호 매겼으나, 사후 미망인의 허락 하에 13번으로 변경됨